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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하지말고 행동하라' 수많은 어록을 남겼던 故 이건희 의 삶

by sajupal 2020. 10. 25.

최근 삼성그룹의 故이건희 회장의 별세 소식이 언론을 타고 전국에 알려지게 되면서 그의 삶이 재 조명되고 있는데요.

오늘은 故이건희의 존경할만한 생애와 어록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故이건희는 별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최고 부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그룹의 총수로 그가 살아생전 대한민국에 미쳤던 영향력도 어마 무시한데요. 그가 삼성그룹의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을 설립한 '故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인데요.

故 이건희 일제 강점기 시절 광복이 되기도 전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조금 내성적이고 사색을 즐겼던 성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이해관계 때문에 안보가 튼튼해진다.' ,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의 길이다' 는등의 보통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어려운 생각들을 많이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故이건희는 어릴 적부터 사람 보는 눈이 좋았다고 전해지는 데요. 故이병철 회장은 그런 이건희의 안목을 알아보고 삼성에서 쫓아냈었던 임원도 다시 불러왔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대학교는 연세대 학교 경영학을 전공하다 자퇴를 한 후 일본의 와세다 대학 상학부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그때 시절 전자제품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원이 없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전자산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故이건희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 '동양방송'입사 1968년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78년 '삼성물산 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에 '삼성그룹 회장'이 됩니다. 故이건희는 故이병철의 셋째 아들이었던 만큼 어릴 적부터 형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삼성그룹의 회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형들이 아버지를 내치기 위해 청와대에 아버지를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데요. 그 결과 두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진압당해 내쳐지게 되고, 故이건희는 나름대로 업무성과를 훌륭하게 내어주어 후게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건희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한 가지로는 삼성그룹의 내부 경영진과 故이병철 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고 그 결정 때문에 지금의 삼성 반도체 사업부가 됩니다. 

이후 삼성은 연매출 10조 원대에서 현재는 연매출만 200조 원을 넘어설 만큼의 성장을 이뤄내는데요. 그 과정 속에 故이건희 회장의 치열하고 과감한 결정을 한 '승부사적'기질이 있었습니다. 삼성이 이대로 가다간 삼류기업으로 남겠다 싶어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루트의 한 호텔에서 임직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게 됩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다 바꾸라'라는 명언을 날리게 됩니다. 당시 그 정도의 의지를 보여준 故이건희의 삼성은 세계 일류 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해 과거의 모든 영광을 날리고 새로운 품질과 서비스를 만들어가자는 일성입니다.

그 이후로 '품질경영'을 앞세워 '애니콜 화형식'이라는 당시 애니콜 핸드폰이 구리다는 것을 앞세워 구미공장 앞마당에서 서 핸드폰 15만 대 '500억'상당의 핸드폰을 태워버립니다.

이러한 방식의 신경영으로 혁신을 추구해 나아갔고 항상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그의 경영방식 덕분에 지금의 삼성전자가 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는 현재의 삼성을 만들고 또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를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요. 때문에 최근 그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애도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